東西古今

싸이와 잡스 그리고 외톨이 인생들

뚜르(Tours) 2013. 5. 5. 00:01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보았다.
천방지축으로 겅중겅중 뛰고 마음껏 흔들어대며 교묘히 외설의 경계를 살짝살짝 넘나드는 이 넉살 좋은 젊은이는 많은 사람에게 풍성한 즐거움과 해방감과 영감을 줄 것이다.
그런데 그 화려한 영상과 흥겨운 리듬과 짜릿한 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소외감과 낙오감을 심화시킬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싸이는 머리 좋고 뱃심 좋고 운 좋은 젊은이임에 틀림없다.
단 몇 분짜리라도 그렇게 엄청난 인원이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현란한 영상물을 제작하려면 분명 치밀한 기획과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 하지만 희대의 행운아가 아니라면 마음껏 ‘(자칭)6甲’을 떨어서 우주적 스타가 되고 돈방석에 올라앉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잘생기지도 못한 외모에 조금 푸석해 보이는 몸매가 오히려 친근감을 주는 것 역시 비범한 행운이다.
그의 행운은 꽃미남, 엄친아에 주눅 든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겠지만
한편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도저히 자산으로 전환하지 못할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절망감을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종작없는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요즈음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나 강연이 한결같이 모든 제약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자아실현을 성취하라고 권고하는 것 같아서이다.
물론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20∼30년 전의 젊은이들과 비교해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몇백 배 크니까 매우 적절한 독려이다.

그러나 아직은 두뇌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모두 성공 신화를 이룩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세상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신화’를 이룬다면 그것은 이미 ‘신화’가 아닐 것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 ‘신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선수들 못지않게 필사적으로 정진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한 많은 경쟁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점점 더 2등을 기억하지 않는 비정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농경사회’였을 때는 정해진 신분질서에 순응하며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이 미덕이었다.
생산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는 자기 신분을 초월하려는 노력은 사회를 교란시키기 일쑤였기 때문.

그러나 서양에서는 15, 16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자기의 ‘분수’를 훌쩍 넘는 모험심과 창의력이 그 자신에게 부와 영광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사회 발전과 국력 신장에 큰 기여를 하면서 ‘개인주의’가 탄생했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악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개인주의’는 사실 서양에서는 발전의 원동력이었고 인권과 민주주의의 초석이었다.(물론 서양의 개인주의 역시 폐단도 무척 많았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관념과 사회 여건상 20세기 초까지도 개인의 자아실현 욕망이 올바르게 발현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개인주의’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사회 여건이 다수 개인의 자아실현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억눌렸던 개인주의적 욕망이 무섭게 분출하고 있다.

광복 이후, 진취적인 개인의 강렬한 성취욕이 한국 사회 발전과 부강의 원동력이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현대사의 주역들, 한국을 빛낸 인물들 대부분이 자아실현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름 없는 대중이 없었다면 그들이 빛나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신명나지 않는 일이라도 성실히 하면서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다수가 없으면 사회는 삶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
모든 젊은이들이 스티브 잡스를 닮으려 하는 사회는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

최근에 자포자기적인 반사회적 범죄가 횡행하는 것도 이렇게 가능성이 크게 열리고
재능으로, 집념으로, 승부수로 성공한 많은 사람에 비해서 자신이 너무 왜소해 보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은 사회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겠는가.

싸이는 “(나는) 누가 뭐라든 내 방식대로 해” 하고 당당히 선언하는데
내 방식대로 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비애는 클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명목상으로는 평등사회이지만 실제로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너무 심하다.
세계가 놀라는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우리 사회가 학력이 신분을 결정하고 신분이 곧 그 사람의 인간적 가치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두 ‘성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성공’한 사람도 행복하기 어렵고 낙오한 사람은 불행을 넘어 반사회적으로 되기 쉽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에게 모험정신과 성취욕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자아실현’이란 것이 반드시 독특한 방식으로 출세하고 명성을 얻는 삶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해 보이는 삶 속에서도 귀한 가치를 이룰 수 있음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생의 낙오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상과 인간이 두려운 사람들을 구원하기에는 경제민주화만으로는 역부족일 것 같다.


서지문 /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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