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저질러야 미래도 있다

뚜르(Tours) 2013. 5. 31. 00:01

# 일 년 전 오늘, 시들해 가던 중년의 사내가 스페인과 맞닿아 있는 프랑스의 오래된 국경도시 생장드피에드포르를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900여㎞에 달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출발이었다.
그 후 47일을 온전히 걸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피레네 산맥을 48L짜리 아이 키만 한 배낭을 메고 죽을 힘을 다해 넘었다.
바스크의 도시 팜플로나를 지나 ‘용서’라는 뜻의 페르돈 고개를 밤새워 넘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순례자 철동상들과 함께 새벽도 맞았다.
폭우와 우박 그리고 진눈깨비가 교차하는 최악의 날씨에도 밤늦도록 오카산을 넘었고,
살이 익어버릴 것 같은 스페인의 아주 특별한 태양 아래 ‘메세타’라는 평균 해발고도 900m의 고위 평탄면이 200㎞나 펼쳐져 있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레온을 지나 칸타브리아 산맥을 넘으면서는 등산화의 뒤축이 갈라져버렸고 발바닥은 터져버렸지만 그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 그렇게 이어진 발걸음은 가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거쳐
대서양과 마주하는 땅끝마을 피니스테레에 이르기까지 계속됐다.
이베리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걸어서 갔던 것이다.
그 2000리가 넘게 이어진 길 위에서 유일한 동반자는 지겹게 내리는 비와 세찬 바람 그리고 간간이 비친 햇살뿐이었다.
정말이지 그 사내는 시쳇말로 ‘힐링’을 위해 걸은 게 아니었다.
‘힐링’을 위해 걷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역설적으로 사내는 행복했다.
자학증세가 있던 것일까?
아니다!
시들해져 가던 중년의 사내에게는 그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저지름으로써 그 사내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가장 자기다운 자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 행복했던 이유였으리라.


 # 산티아고 가는 길로 떠나기 직전에 그 사내는 지쳐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그럭저럭 모양 갖추며 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진짜 자신의 삶을 추동해 갈 내면의 에너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이미 고갈돼 있었다.
겉으로 보면 남부럽지 않은 삶의 조건들이 펼쳐져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면의 실존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날 선 위기의 칼날이 목젖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씩 시들다 못해 스스로 죽어가던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는 안주하던 일상을 훌쩍 박차고 길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단지 힐링을 위해 2000여 리 길을 홀로 걸은 게 아니었다.
너무나 절실하게 살고 싶고 또 살기 위해 걸었던 것이다.
그 걸음은 달팽이와 다를 바 없이 느렸지만 정말이지 삶 전부를 건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 만만한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처절한 것이다.
실제로 삶은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때 가장 윤기가 난다.
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중년은 윤기를 잃어가는 나이다.
특히 남자 나이 50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어느 순간 삶에서 안락함을 선물 받는 대신 처절함을 상실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너무 어딘가에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너무 하던 일과 삶에 익숙해져서인지도 모른다.
너무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
그것도 깊은 변화가 절실하다.
그 변화의 출발은 다름 아닌 저지름이다.
미래는 그 저지름 속에서 발아된다.
20대, 30대에 던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의 축 어깨 처진 군상들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다.


 # 스스로를 위로한답시고 궁상떨지 마라.
삶은 위로 받고 싶은 게 아니다.
오히려 저지르고 싶은 거다.
인생이 끝나는 시점은 생물학적 호흡이 그치는 시각이 아니다.
저지르지 못할 때 우리 인생은 사실 이미 끝이 난 게다.
저지름!
그것은 삶이 죽지 않았다는 본능적 신호다.
창조?
미래?
모두 다 그 저지름에서 시작된다.
저질러라!
그것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진짜 증거이니깐!


정진홍의 <소프트파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