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샘물

하느님의 부르심

뚜르(Tours) 2013. 12. 15. 22:23

 

    하느님의 부르심 커튼 사이로 들어 오는 햇살이 기분을 맑고 가볍게 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오랫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탓인지 맑은 영혼과 건강한 육신으로 삶이 이어짐에 감사하며 문득 여기저기에서 들은 말씀들이 생각나서 겨울 문턱에 들어서는 주일 아침 단상(斷想)을 적어 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는 삶,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각자의 삶의 방식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영적식별(靈的識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恩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은총을 영적감수성(Inspiration)에 의해서 판단하게 되면 오류(誤謬)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현존(現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일의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는 성령과 악령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지만, 악령은 분열을 목표로 합니다. 성령은 친절하게 하지만, 어둠은 의로움을 내세워 권위(權威)를 내세웁니다. 친절은 자기를 비우고 이웃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가득한 자아(自我)를 정의롭다 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깨려하는 것은 결코 성령께서 이끄심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한 인내(忍耐)로 이끄십니다. 공동체를 이끄는데 가장 필요한 은총은 바로 인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소리를 듣고 그 소리의 진원(震源)이 인식될 때까지 침묵(沈默) 중에 성령의 가르침에 확신이 들 때까지 성령의 거룩한 열매가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기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 주시는 분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주 만나는 우리는 만날 때마다 기뻐해야 합니다. 앞에서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뒤에서는 손가락질 하는 위선(僞善)의 너울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쁘고 평화스러울 때만 성령충만으로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울하고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에 성령께서는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성령께서는 여전히 우리 안에 계시며 무엇이 하느님의 섭리(攝理)인가를 우리가 물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 이냐시오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좋은 것을 선택함에 있어 하느님의 뜻을 묻는 것"이라고. 우리는 좋은 것을 선택할 때마다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험이며 두려움을 수반(隨伴)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광야로 부르시는 하느님을 따라 나서는 것, 다른 사람이 허리띠를 매어주고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혼을 불러내어 세상이란 불확실한 곳으로 우리를 걷게 하십니다. 나는 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 자체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하려 노력합니다. "For in God our hearts rejoice in your holy name we trust." "그분 안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우리의 믿음은 거룩하신 그분 이름에 있다."(시편 33,21) Martin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