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tings(손님들에게)

어머니의 여한가

뚜르(Tours) 2018. 8. 23. 09:33



어머니의 여한가

 

 

열여덟 살 꽃다울 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세 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기르느라

철 지나고 해 가는 줄 모르는 채 살았구나!

 

봄여름에 누에치고, 목화 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땡감 따서 곶감 치고, 배추 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유밀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 높이 간직하네.

 

찹쌀 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 박아 제일 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 술로 떠낸 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 리로 걸러내서

들 일 하는 일꾼 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 명은 족한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 절구질 해 연기로 삶아 건져

 

밥 짓고 국도 끓여 두 번 세 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근처럼 무거웠네.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을 갈라 늘 여 베틀 위에 걸어놓고

눈물 한숨 졸음 섞어 씨줄을 다져 넣어

 

한 치 두 치 늘어나서 무명 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 내려 삶아내서

햇볕에 바래기를 열두 번은 족히 되리

 

하품 한 번 마음 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졸고 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어

무거운 눈 올려 뜨고 한 뜸 두 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 끝이 손 톱 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 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수발 어찌 할꼬?

탐탁찮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고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 차

맵고 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 가득

차 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 녀석 세워 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 시키면

일할 엄두 사라지고 한숨이 절로난다.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는 여남은 번 족히 되고

 

정월 한식 단오 추석 차례 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 해도 거들사람 하나 없고

여자라곤 상전 같은 시 어머니 뿐이로다.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매워라.

큰 아들이 장가들면 이 고생을 면할 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 신세가 나아질까?

 

이 내 몸이 죽어져야 이 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 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 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 없이

어느 틈에 자랐는지 짝을 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 쌍같이 영감하고 둘만 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 것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내 마지막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 않네.

 

안채 별채 육간대청 휑하니 넓은 집에

가문 날에 콩 나듯이 찾아오는 손주 녀석

어렸을 적 애비 모습 그린 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 어미를 탁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 일 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것들 앞세우고 하나 둘씩 모여들면

절간 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 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 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 된장, 양념까지

있는 대로 퍼 주어도 더 못주어 한 이로다.

 

손톱발톱 길 새 없이 자식들을 거둔 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 한 거더냐?

속절없는 내 한평생 영화 보려 한 거더냐?

 

꿈에라도 그런 것은 상상 조차 아니 했고,

고목나무 껍질 같은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내 신세는 접어두고 자식걱정 때문일세.

 

회갑 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 채비 늦기 전에 해두려고

때깔 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 든 해 손 없는 날 대청 위에 펼쳐놓고

도포 원삼 과두 장매 상두꾼들 행전 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지었네.

 

무정한 게 세월이라 어느 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거라

 

내 살 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 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원도 한도 난 모른다. 이 세 상에 미련 없다.

서산마루 해 지듯이 새벽 별빛 바래듯이

잦아들 듯 스러지듯 흔적 없이 지고 싶다.



출처 : 카페 '어머니,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