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모 대학 대학원장인 친구의 권유로 지난 주 그 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중언부언 횡설수설 1시간 남짓 진땀을 뺐는데, 남들 앞에 서서 오래 이야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습니다.
세미나나 모임의 사회ㆍ진행자는 꽤 해봤습니다.
그것도 그리 잘 하지는 못했지만, 일정한 주제 아래 1시간 이상 혼자 떠드는 것은 영 다른 일입니다.
말 잘 하는 연사들, 교수들이 그 날 이후 더 존경스러워졌습니다.
어렵게 강의(정말 낯 간지러운 말이지만)를 마치고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친구가 지방살이, 교수의 삶, 이런 말을 하다가 건배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도시의 주요 인사인 그는 각종 모임에서 건배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애용하는 말은 ‘사우나’. “사랑과 우정을 나눕시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대로 모임에서 건배사를 하는 것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한 징표일 수 있습니다.
행사 상황과 참석자들 수준에 알맞는 건배사를 하고, ‘사우나’와 같은 건배호(乾杯號)를 적절히 선창하면 환영 받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단합과 네트웍의 힘을 누구나 잘 아는 사회에서는 모임과 행사가 중요하고, 건배사와 건배호가 덩달아 중요해집니다.
순서도 문제입니다.
나는 최근 어느 모임에서 건배사 제의를 받고 일어나 한마디 했습니다.
주최자는 조금 있다가 내 옆의 모 그룹 회장에게 건배사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어색해졌습니다.
그가 속으로 씩씩거리는 게 빤히 보였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서열이 낮아? 신문사 주필 만도 못해?”
그거지요.
“한 번 하시지요” 하고 권하면서도 나는 ‘꼴 같지도 않은 게 바보같이 노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0여분 후 전화를 받으며 나갔는데(전화는 진짜로 왔겄지?), 그가 나가는 걸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와 헤어져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건배사와 ‘건배사 사회’에 관한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역시 ‘위하여’입니다.
건강과 행복, 단체와 개인의 발전 이런 걸 축원하는 게 건배의 취지이니 이 말이 많이 쓰이는 건 당연합니다.
그게 너무 일본식(?)이라고 한때 ‘지화자’ ‘조다’로 바꾼 사람들도 있지만, 끝내 ‘위하여’를 압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요즘 주목을 받는 고려대 출신들은 이를 변형시켜 ‘위하고!’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건배사와 건배호는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이 많은 분들은 ‘구구팔팔이삼사’(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이삼일 앓다가 사망)를 애용합니다.
그러나 최근엔 너무 오래 살아도 문제라는 뜻에서 ‘팔구…’로 바꾸어 쓰는 분들도 있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간 한국인들이 흔히 외치는 말 “나이야 가라!”도 나이 든 분들의 것입니다.
“나이야” 하고 선창하면 “가라!” 고 받는 거지요.
요즘 한창 유행하는 ‘당신멋져’는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는 의미입니다.
“당신” 하면 “멋져” 하고 외칩니다.
이 역시 중ㆍ노년 용입니다.
모임을 시작하면서 ‘개나리’를 외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계)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릴랙스(Relax 또는 Refresh) 하자’는 거라니 말장난이 심합니다.
사실 건배호 자체는 다 말장난입니다.
‘진달래’(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나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도 그런 경우입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연말모임에서는 2차를 자제하자는 뜻에서 ‘초가집’(초지일관, 가자, 집으로)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나 봅니다.
히트곡 <텔 미>의 가수그룹 이름인 ‘원더걸스’(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스로 마시자)는 네 글자여서 긴장도가 떨어지고 어거지로 만든 티가 역력합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도 있다고 합니다.
‘현재를 즐기자’(Seize the day)는 뜻의 이 라틴어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주인공 키팅 선생님이 자주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뜻으로 “카르페” 하면 “디엠” 하고 외칩니다.
어떤 건배호로 말을 맺든 건배사를 길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되도록이면 간결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Kiss의 원칙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던데, ‘Keep it simple and short’의 약어랍니다.
그런 Kiss에다 유머까지 곁들이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저 사람의 말을 더 들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진짜 말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대체로 공개석상에서 말을 하는 데 서투른 편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에 조리가 없거나 문장이 끝나지 않고 그러는 것은 평소 훈련이 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유머까지 곁들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주문일 것입니다.
휴양지나 위락시설에 온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면 하는 말이 천편일률입니다.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나왔는데, 경치도 좋고요, 사람도 많고요, 스트레스가 확 풀려 좋은 것 같아요.”
스트레스가 없으면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연예인들의 경우 “이러구요 저러구요”하다가 “열심히 할 게요. 많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 하고 끝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는 억양이나 코맹맹이 소리(꼭 바보같음)까지 아주 비슷합니다.
눈치 없이 장황하고 지리하게 말을 늘어놓아 남들 다 배 고프게 만들어 놓고는 “간단하나마 이상으로 축사에 갈음합니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음이라는 말은 어떻게 알아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라도, 그런 사람을 보면 확 쥐어 뜯고 싶습니다.
요즘은 “우리들의”를 “우리들으”라고 하거나 “에또”, “마~, 마~” 그러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나는 건배사에 ‘나가자’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가정을 위해, 자신을 위해” 이런 뜻입니다.
점잖은 자리에서는 일단 그렇게 의미를 풀이하는데,
좀 편한 자리여서 장난기가 생기면 ‘나가자’엔 두 가지가 있다, 좋은 걸 각자 골라서 외치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나가자’는 “나라를 버리고, 가족을 팽개치고, 자기만 챙기자”입니다.
두 번째 것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나가자’를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불분명합니다.
내가 생각해 냈던가, 아니면 누구한테서 들었던가? 잘 모르겠지만, 저마다 그럴 듯한 건배사와 건배호를 개발해서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건배호는 즐거운 말장난이니까.
<임철순의 한 입 편지>중에서j
'이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에게도 노계(老計)가 있소?” (0) | 2008.12.05 |
---|---|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열어 두어라 (0) | 2008.12.05 |
늦깎이는 없다. (0) | 2008.12.01 |
정천 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0) | 2008.11.28 |
죽음보다 강한 사랑 / 펌 (0) | 2008.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