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명의 자녀를 둔다는 것과 1000곡 이상을 작곡한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까?
아마 둘 중 어느 것도 만만치 않은 일임은 자명하리라.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을 ‘뚝딱’ 해치운 사람이 인류 역사상 한 명 있었다.
바로크 음악의 정점을 이룬 요한 세바스찬 바하다.
예순 가까운 나이에도 아이를 만들어 노익장을 과시했음은 물론,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작곡의 펜을 놓지 않았다.
가히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밤이 무서운 남자들에게나, 창작의 열의가 일찍 시드는 음악인에게나…
바하는 바로크 후기의 거장이었다.
하지만 바하의 음악을 생각하면 바로크 시대의 화려한 건물보다는 고대의 석조건물이 떠오른다.
시멘트 같은 접착물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세월을 변함없이 지탱해온 건물들,
정확하게 자른 돌과 치밀하게 쌓아올린 건축방식이 그러한 건물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줬듯,
바하의 음악은 기술적인 완벽함을 토대로 오늘날까지도 세인의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사실 그 완벽성 때문에 작품에 흐르는 예술적 감성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바하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안다.
그의 다작이 작품의 질을 결코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바하가 당시의 음악양식과 기법을 얼마나 폭넓게 포괄했던가에 경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완벽한 기법에 가려져있던 숭고한 정신과 찬란한 예술성에 전율한다.
바하는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총 1100여곡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40여년 동안 2주에 한곡씩을 작곡한 셈이다.
무엇이 이러한 다작의 원천이었을까?
그는 천재성과 노력을 결합해낸 몇 안되는 인간 중 하나였다.
워낙 노력하는 인간이었다는 평 때문에 그의 천재성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실상 그의 천부적인 재질은 어린 시절부터 유명했다.
예술성이 결여됐다는 이유로 바하를 장인수준으로 격하해 평가한 동시대인들조차
그의 연주자로서의 자질에는 탄성을 보냈다.
바하를 둘러싼 외부적인 여건도 그의 다작을 부추겼다.
27년간 재직한 토마스 교회에서는 미사 때마다 새로운 칸타타를 시연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또한 바하의 명성을 들은 여러 왕과 귀족들이 작곡을 의뢰했다.
당시의 피임방법이 없었다는 것은 바하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후대의 우리에게는 축복이었다.
바하는 두 번 결혼해 각각 7명과 13명 도합 2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10명은 어릴 때 사망했고 살아남은 10명 중 다섯 명은 음악가가 됐다.
유명함의 차이는 있지만 바하라는 성씨를 가졌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바하로 불린다.
다만 아버지와 구별하기 위해 ‘함부르크의 바하’나 ‘밀라노의 바하’ 등, 주요 활동지역을 성씨 앞에 붙여서 부른다.
노재봉 / 대외경제정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