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이어령의 한국인의 이야기(16)

뚜르(Tours) 2009. 11. 18. 11:44

사주는 태어난 날의 시까지 따지면서 태어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인에게 사주보다 더 무서운 것이 風水인 까닭이다.
사주는 바꿀 수 없지만 장소는 옮길 수 있고, 사주는 살아있을 때만의 일이지만 풍수는 죽어서도 후손에 영향을 미친다.
풍수사상이 아니라도 살아있는 것은 모두 거처하는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우는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首丘初心>의 사자성어가 생긴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캐나다의 중국계 인문지리학자 이후은 <토포필리아>라는 말을 만들어 학계에 큰 관심을 일으켰다.
토포필리아는 희랍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Topo)>와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합쳐서 만든 조어로
<場所愛>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연환경과 인간존재를 이어주는 정서적 관계를 나타낸 이론인데
풍수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서양에서는 그 말을 영국 시인 W H 오든이 먼저 썼다느니,
또 누구는 <통섭>으로 유명해진 에드먼드 O 윌슨의 <바이오필리아(生命愛)>가 토포필리아를 원용한 것이라느니 꽤나 시끄럽다.

하지만 한국의 시인 김소월은 그들보다 반세기도 전에 몇 줄의 시로 토포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후렴을 빼면 다 합쳐도 30자밖에 안 되는 시지만 그 속에는 한국인이 살고 싶어하는 욕망의 공간이 숨은 그림 찾기처럼 감추어져 있다.

<강변 살자>고 한 자연공간은 직접적으로 표현돼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전의 <엄마야 누나야>는 그게 <아빠야 형님아>와 대립하는 여성 공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과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에서 우리는 앞뜰과 뒷문의 전후 공간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앞 공간에는 반짝이는 빛의 시각공간이 있고 뒷문의 후방공간에는 갈잎의 노래가 들려오는 청각공간이 대칭을 이룬다.
금모래는 무기물의 입자요, 갈잎은 황금색과 대조를 이루는 초록색 유기물의 평면성이다.
빛과 바람소리로 진동하는 이 방향, 감각, 물질로 이루어진 공간은 뜰 앞에 흐르는 강물과 뒷문 밖을 에워싼 산의 전체적 경관을 보여준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 어디에서 많이 보고 들어본 경관 같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 먼 조상에서부터 오늘의 부동산 업자까지 목마르게 추구해온 <背山臨水>라는 집터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도, 타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정지용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 부른 그 공간이다.
그게 기와집인지, 초가집인지, 하얀 집인지, 푸른 집인지는 몰라도 산과 강 사이의 경계에 있는 집터의 경관만은
산수화처럼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달래 마늘의 향내가 나는 한국인의 <토포필리아>다.
우리가 어릴 적에 <엄마야 누나야>라고 부르던 여성 공간이다.
우리가 <母國>이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디아스포라(실향민)>로서의 한국인에게는 다만 가슴속에만 존재하는 <부재의 공간>이다.
<아빠야 형님아>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현존하는 그 장소는 적어도 그 아이가 살고 싶다고 노래한 그 강변은 아닐 것이다. 반짝이는 금모래가 아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아니다.
아스팔트의 길에서 위급한 구급차의 경보음처럼 외치며 경쟁하고 투쟁하고 땀 흘리면서 살아가는 남들(他者)의 공간, 디아스포라의 이국땅이다.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고/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노래를 시키면 나는 으레 이 노래를 불렀다.
손뼉을 치면서도 왠지 쓸쓸한 표정을 짓는 손님들 앞에서, 한국인들 앞에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고 노래한 그 시 속의 아이처럼,
나는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구성지게, 아주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그래야 칭찬을 많이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