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골프여왕 신지애 / 조선일보

뚜르(Tours) 2009. 11. 30. 17:32

'밀리언 달러 베이비' 골프여왕 신지애
제 또래들이 만나면 무슨 얘기하는지 전 그게 정말 궁금해
키 작다고 생각한 적 없어 스스로 높이지 않으면 내가 높아질 수 없어

약속 장소에 도착해 출입구를 찾을 때, 바로 뒤따라오던 검은 외투에 펑퍼짐한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과 안경을 쓴 작은 키의 통통한 처녀가 "출입문은 이쪽이에요" 하고 말했다.

우리는 같이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신 선수가 어디 있지?" 하며 두리번거렸다. 동석할 때까지 그가 신지애 선수인 줄 몰랐다. LPGA 3관왕(신인왕 상금왕 공동다승왕)에 오르고 올해만 5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골프 여왕'의 위용이 이럴 수는 없었다.

나중에 그는 "그건 골프 안에서의 얼굴이죠. 바깥에 나가면 달라요"라고 했다. 그는 '선머슴' 같은 21세의 처녀였다. 나이로 치면 그 아버지가 나와 동갑이었다.

신지애 선수는“골프장 밖으로 나오면 세상 물정 모르는‘소녀’이기 때문에 내 또래 친구보다 내가 더 어리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한 인터뷰에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질문을 받고서 "아빠의 역할"이라고 말한 적 있지요?

"아빠가 왜 저를 힘들게 운동시키는지 그 이유에 대해 묻고 싶었던 거죠. 물론 다 제가 잘되라고 하시는 것이었지만요."

―신 선수의 아버지는 드라이버 스윙 1000회, 폐타이어 치기 400회, 운동장 20바퀴 돌리고, 퍼팅을 7시간씩 시켰다고 들었습니다. 나이 어렸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면 아버지의 말을 안 들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횟수를 강요한 적은 없고요, 어떤 연습은 제가 원해 더 하기도 했지요. 어쨌든 그런 혹독한 훈련에서 한 번도 반항한 적이 없었어요. 아빠도 이 점에 대해서는 제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나이가 들었다고 아빠 말을 안 들어요? 아빠는 항상 저보다 나이가 더 많잖아요. 그때로 되돌아가 훈련해야 한다면 정말 골프를 안 할 거예요. 뭐, 아빠가 하라면… 해야겠죠."

―같은 또래 친구에 비해 본인의 정신연령은 어떤가요?

"상황에 따라 다를 거예요. 골프장에서는 제가 경험이 많고 제 또래의 여자애라면 대부분 골프를 모르죠. 마음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제가 더 강할 것 같지만, 골프장 밖으로 나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이기 때문에 제가 더 어릴 수도 있고요. 친구들이 하는 공부나 쌓은 지식 면에서는 제가 많이 부족해요. 저 자신이 참으로 이중적이죠."

―어떤 부분에 지식을 더 쌓고 싶어요?

"저는 호기심이 많아요. 특히 그림이나 물리, 생물학 쪽에 관심이 있어요. 공부를 못해서 운동을 한 것이지만 운동을 하다 보니 더욱 공부와 멀어졌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어요. 물론 아빠가 시켜서였죠."

손가락 마디가 굵고 악수하면 두꺼운 질감이 느껴지는 손.

―골퍼로서의 체격조건으로는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니지요?

"나쁜 조건도 아니에요. 오히려 안정감이 있으니까요."

―'내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인가요?

"전 제 키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동의할 줄 알았는데요.

"제가 자신을 낮추면 낮아질 수밖에 없어요. 저 자신부터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야 높아지지, 이걸 이기려고 낑낑 노력해야 탈출하지요. 저부터 체격조건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어요."

―중3 때는 '나도 여자다. 일단 살을 빼고 싶다'며 두 달간 조깅해 3kg 감량했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체력이 달려 안 된다'며 한약을 먹여 원상 회복시켰다지요. 이제 아가씨이니까 몸매에 대해 더욱 생각을 하겠지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저는 운동선수이고요, 이제 시작 단계고 해야 할 게 많아요. 좋은 성적을 내고 지금처럼 꾸준하게 가야 해요. 그러니 몸매에 신경 쓰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요. 그리고 먹는 것은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많이 먹지는 않아요."

―그런데 얼마 전 인터뷰에서 "앞으로 10년만 골프를 하고 안 하겠다"고 했다면서요?

"골프만 치기에는 너무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데, 골프만 계속 치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후회가 생길 것 같아요. 지금 내게 골프가 100점이라도 내 인생을 통틀어 보면 결코 100점에 훨씬 못 미칠 거예요."

―사람 살면서 하나도 잘하기 어려운데.

"제가 10년을 더 한다는 것은 '짧고 굵게'라는 말과 같아요. 지금은 골프에만 집중하고 나중에는 골프에서 벗어나 다른 것에 집중하겠다는 것이에요. 어떤 시기에 하나씩 하나씩 집중하면, 나중에 돌이켜보면 여러 개의 삶이 되겠지요."

―어떻게 살면 의미 있는 삶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군요?

"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엄마 때문이죠.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이거든요. 사람이 사는 것에는 끝이 있다는 거죠. 사람의 일생과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해 알게 되니까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게 됐죠. 한정된 삶이라면 좀 더 완성도가 있는 삶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거죠. 히히, 너무 철학적인가요."

―사람이 사는 것에 끝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 지금의 행위조차 허무하지 않나요?

"허무하지 않게 되기 위해 지금 열심히 사는 거죠. 나중에 돌이켜 봐서 지금 하는 행위가 허무한 것이 되지 않도록 말이죠. 미리 허무하다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허무하죠."

―중3 때(2003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때 탄 보험금을 신 선수의 훈련 경비로 썼다면서요?

"그때 아빠가 방바닥에 통장을 툭 던지며 '이게 엄마 죽음에 대한 보험금이다. 이 돈을 지애 훈련 경비로 쓰자'고 했지요. 빚을 제하고 남은 보험금 1700만원이었어요. 그때 내 마음속에는 가족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뿐이었죠. 골프는 '멘털(정신)게임'인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제가 강한 '멘털'을 갖게 된 거죠. 그 다음 해부터 시합 성적도 좋았고요. 올해 상금이 50억원이 넘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때의 1700만원이 지금의 50억원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고 봐요. 결코 따라갈 수가 없어요."

―돈의 가치에 대해 일찍 알았지요?

"골프가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인 데다 절박한 상황까지 갔으니까요. 돈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죠. 저는 돈이 없어 어렵던 시절 주위 분들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30만원씩 다달이 부쳐주시던 몇몇 분들이 계셨어요.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저처럼 그런 기회를 주고 싶어요. 어려웠을 때 받은 도움으로 제가 지금 많은 돈을 벌게 된 거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도움을 받아야 많이 벌 수 있게 되겠죠. 돈은 그렇게 계속 돌아야 한다고 봐요.

하지만 지금처럼 너무 많이 들어오니까 한편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요. 돈이 없다가 갑자기 많이 생기면 사람이 쉽게 바뀐다잖아요. 나도 그렇게 바뀌게 될까 걱정하죠. 물론 지금은 돈에 대해 더 이상 생각을 안 해요. 저는 시합에만 집중하면 되지, 돈 벌려고 골프하는 시기는 한참 지났잖아요. 이제는 제 목표와 명예를 위해 골프를 하죠. 번 돈으로 나중에 뭘 하겠다는 계획도 없어요."

―동생과 함께 카페를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왜 카페지요?

"여동생이 고3인데, 일찍 영업을 해보고 경험을 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빠도 허락하셨어요. 카페를 생각한 것은 선수들끼리 골프 치고 나와서 쉽게 어울리는 공간이 카페거든요."

―교제하는 친구들이 대부분 골프 선수들이지요?

"화제도 늘 골프죠. 골프 얘기하는 게 당연하고 편안하죠. 그러니 다른 일반 사람들과는 친해지기 어려워요. 제 또래 학생은 골프에 대해 모르죠. 이들과 섞이면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아요. 제 또래의 친구들은 어울리면 무엇을 화제로 삼는지 전 그게 정말 궁금해요. 학교에 잘 다니고 여가를 즐기는 것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아마 그 친구들은 신 선수를 훨씬 더 부러워할 겁니다.

"상대적이죠. 항상 남의 떡이 더 커보이죠. 예전에 비해 주목받고 나니까 더욱 일반적인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쉽죠. 귀국하니 스케줄에 짜여 분(分) 단위로 움직여요. 10년 뒤에는 일반 사람들처럼 저도 여유를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그 여유를 지금은 왜 안 가집니까?

"지금은 목표가 있고 편안함을 느낄 시기가 아니죠. 더 노력하고 발전해야 하는 시기죠. 지금 편안함을 느끼면 배부른 거죠."

―골프채를 잡은 뒤로 '왜 이걸 해야 하느냐'며 회의가 든 적이 없나요?

"그런 건 없어요. 골프는 저를 만들어줬어요. 골프 하기 전에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지만 그나마 즐기고 긍정적이 된 것은 골프를 치면서 그렇게 됐죠. 골프를 통해서 많은 걸 얻고 있거든요."

―남자 친구도 얻었나요?

"히히, 친구들이야 많죠."

―술도 마십니까?

"마셔본 적은 있죠. 하지만 골프란 예민한 운동이라 술을 마시고 나면 그런 감각이 줄어들어요."

―신 선수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대담한 역전승을 많이 해 '파이널 퀸(Final queen)'이라는 별명도 붙었지요. 한 샷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면 누구든 흔들릴 겁니다. 그런 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요?

"저도 흔들려요. 안 흔들리면 이상하죠. 흔들리는 이유는 내가 우승에 가깝게 와 있기 때문이죠. 그런 기회가 왔으니 흔들리는 거지 우승과 상관없다면 안 흔들리죠. 이럴 때 내가 '마인드 컨트롤'을 잘한다고들 하지만 '컨트롤'은 조절한다는 뜻이잖아요. 사실 저는 '조절'하는 게 아니고 마음의 기본 바탕에 있어요. 기본 바탕에서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떨리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걸 편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이번 LPGA 마지막 시합에서 한 타 차로 '올해의 선수상'을 놓쳐 눈물을 보였다면서요?

"울었던 게 저한테 도움이 됐어요. 그만큼 아쉬움이 있었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뿐이었어요. 속에 있는 답답함이 나와서 지금은 훨씬 더 좋아졌어요."

―신 선수의 어휘 구사능력을 보면 혼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책을 좋아해요. 소설과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어요. 두 달 전에 읽은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은 감동적이었어요. 사람은 자기의 생각으로만 모든 걸 판단하지 말라고 했어요. 심리학 책도 제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휴식시간도 있고 골프채를 안 잡고 쉬는 날도 있겠지요. 그때는 무얼 해요?

"쉬는 날이 있기는 해도 충분한 시간은 아니죠. 첫 번째는 잠을 보충하려고 하죠. 잠은 체력과 연관이 되어 있죠. 그다음에는 음악을 듣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죠. 한때는 컴퓨터 게임을 즐겼지만, 이제는 완전히 흥미가 없어졌어요."

―레이스광(狂)이라고도 하더군요.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에서 아빠로부터 운전을 배웠어요. 운동 감각을 키운다는 차원이었지만 제가 운전을 좋아했고요. 시속 240㎞까지 페달을 한 번 밟아본 적은 있지만 막 달리지는 않아요.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빠가 운전이 위험하다며 운전할 시간을 많이 안 주세요."

―골프시합 투어 내내 아버지가 따라다니면 불편할 때도 있지요?

"그럴 때도 있죠. 아빠는 골프가 완벽한 운동이 아닌데도 늘 완벽을 요구하시죠. '생각하는 골프를 해라'고 하시죠. 히히, 내가 단순하게 보이는 모양이에요. 지금 저는 훌륭한 딸이 되려고 하는 과정에 있어요. 오랫동안 훌륭한 딸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오니, 장미란 선수가 역도에서 세계 신기록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