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최적과 부분최적 사이의 갈등
조직의 딜레마, 즉 전체최적과 부분최적 사이의 갈등은 인간사회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업보(業報)이다.
전체최적을 추구하려면 어느 부분최적이 희생되어야 하고,
부분최적의 희생을 피하려면 전체최적이 그만큼 후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느 하나를 위한 선택은 다른 하나에 대한 포기를 수반한다는 것이 위 진리명제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전체조직과 부분조직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의 조정(coordination)은 경영자가 풀어야 할 기본적 과제의 하나이다.
공중도덕의 문제도 그 본질을 전체최적과 부분최적 사이의 갈등에서 온다.
개인이 자동차를 운전할 때 어떤 교통법규를 위반하거나,
등산할 때 쓰레기를 산에 버리고 오는 것이 그 개인의 입장에서는 부분최적이 되지만,
사회전체(전체최적)의 입장에서는 해악이 되는 것도 두 최적간 갈등의 예이다.
그러나 부분조직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질 경우에도 전체최적을 위하여 부분최적의 희생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1979년 이란(Iran)이 미국대사관 직원을 모두 인질로 잡고 있을 때의 일이다.
미국은 이란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항공모함 미드웨이(Midway)호를 페르시아만으로 진입시켰다.
이 때 Midway호에 기름을 공급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데 미국계 회사인 Exxon이 페르시아만 근처에 정유공장을 가지고 있었고,
미 국방성은 Exxon사에 Midway호의 기름공급을 의뢰했다.
그러나 Exxon사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자기 모국의 군함에 기름을 공급해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나쁠 것이 없다.
그렇지만 이란의 세력권인 페르시아만 일대에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는 Exxon이
(이란을 위협하러 온) Midway호에 기름을 공급하면 이란의 보복이 없을 것인가?
Exxon만의 입장에서 본 ‘부분최적’은 미국 국방성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자는 당시 미국에 있었고,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저자는 미국의 국력을 부러워했다.
한국 같은 약소국의 경우에는 일개 기업이 부분최적보다는 국방의 문제, 즉 전체최적이 우선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편 부분조직들이 망하면서 전체조직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도 진리이다.
부분단위의 안위(安危)에 관한 고려를 무시한 채 전체최적만을 생각한 미 국방성의 생각은 부족한 것이었다.
진정 국민을 아낄 줄 아는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인 빈곤탈피나 무한경쟁 속의 생존문제처럼, 국가나 기업의 생존능력 자체가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의 지도층 혹은 기업의 경영진은 가능한 한도까지 전체최적을 우선시(優先視)하여 전체조직을 살려내야 한다.
# 장기최적과 단기최적간의 갈등
드골(C. De Gaulle, 1890~1970)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영국으로 건너가 1940년 프랑스 망명정부(the Free French Forces)를 조직하고 독일에 계속 항거했다.
종전이 되자 개선장군으로 귀국하여 1945년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에게 (위대한 프랑스를 건설하기 위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치자 1946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향리(鄕理)로 은퇴했다.
1958년 프랑스가 알제리(Algeria)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되자,
프랑스 여론은 드골을 다시 불러들였고, 이에 드골은 ‘대통령은 강력한 권한을 허용하는 헌법’을 제정한다는 조건으로 1959년 대통려에 취임했다.
드골은 강력한 프랑스의 구축은 (내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오늘 허리띠를 동여매는) 장기최적(long-term optimization)정책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고, 이런 정책을 추진하려면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헌법은 통과되었고 드골은 대통령으로서 그가 소원했던 ‘위대한 프랑스의 구축’을 위해 장기최적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 후일을 위하여 오늘을 희생하는 정책, 단기최적의 희생으로 장기최적을 추구하는 정책은, 프랑스 국민들, 특히 젊은 학생들과 노동자그룹의 반발을 불러 1968년 격렬한 시위로 이어졌다.
이에 드골은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패배가 확실해지자 투표의 최종집계가 나오기도 전에 하야(下野)방송을 하면서, “매일 치즈(cheese)를 바꿔 먹는 국민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치즈는 독특한 맛과 향을 즐기기 위해 (포도주와 함께) 먹는 디저트(dessert)로서 프랑스에는 그 종류가 360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 치즈를 바꿔 먹을 만큼 낭만과 향유(享有)를 중시하는 프랑스 국민에게 (내일의 위대한 조국을 위해) 오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골의 공박이었다.
이런 국민의 대통령 노릇을 한 것이 부끄러우니 “내가 죽으면 장례식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국장(國葬)으로 치르지 말고, 차라리 육군장군의 신분으로 (격하하여) 치러 달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지 못했고, 드골의 유해는 군장갑차에 실려 가족묘지에 묻혔다.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 이 사실(史實)은 장기최적과 단기최적간의 갈등이 얼마나 지도자들을 괴롭혀 왔는가를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기업은 영속적 존재(going concern)이므로 장기최적 의사결정의 중요성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장기최적을 추구하는 일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와 오늘을 즐길 수 있는 단기최적의 유혹을 극복해야 가능해진다.
따라서 의사결정자가 2 ~ 3년의 짧은 임기 속에 묶여 있거나, 증권시장 같이 단기적 이익을 원하는 압박이 존재하면 장기최적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 한국이 경제개발 초창기에 세계를 놀라게 하는 성장을 한 것은,
장기적으로 안정된 정부, 임기에 구애되지 않는 창업자에 의한 장기최적이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조직의 지도자는 결국 (공간차원에서) 전체최적과 부분최적 사이의 갈등, (시간차원에서) 장기최적과 단기최적 사이의 갈등을 조정(coordinate)하는 일을 주요 사명으로 해야 한다.
갈등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인간이다.
따라서 조직의 경영은 (시간차원과 공간차원 이외에) 또 다른 요소, 즉 인간차원을 탐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윤석철 지음 <경영학의 진리체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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