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측간 쥐와 곳간 쥐

뚜르(Tours) 2013. 3. 16. 21:22

 

진(秦) 시황(始皇)의 총신 이사(李斯)는 젊은 시절 초(楚)나라 상채(上蔡)라는 고을의 아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변소에 갔더니 쥐가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을 보고 놀라 황급히 달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번은 창고엘 갔더니 그곳 쥐들은 들킬 염려도 적고 먹을거리도 많아 여유 있게 곡식을 축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현명함과 못남은 저들 쥐와 같다. 스스로 처하는 곳에 달렸을 뿐이다.’
이사는 벼슬을 내던지고 순경(荀卿 :荀子)을 스승으로 모시고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진나라로 가 시황의 아버지 자초(子(楚)를 왕위에 오르게 한 실력자 여불위(呂不韋)의 천거로 왕의 책사가 되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얻은 이사는 “큰 공을 성취하는 사람의 특징은 남의 약점을 틈타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며 전국의 통일을 역설했습니다.
또한 제후국 명사들 중 재물을 탐하는 자는 금과 옥으로 매수하고, 그에 응하지 않는 자는 자객을 보내 제거하는 계책을 올려 이를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위기도 있었습니다.
종실 사람들과 대신들이 “제후국에서 온 사람으로 진나라 왕을 섬기는 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출신국 임금을 위해 진나라의 빈 틈을 만들 뿐”이라며 객인을 내쫓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이사도 그 대상에 올랐습니다.

이에 이사가 올린 상소는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유명한 변설입니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아 그 높음을 이루었고, 하해(河海)는 가는 물줄기도 받아들여 그 깊이를 이루었습니다. 빈객을 물리쳐 다른 제후국을 돕게 하는 것은 적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소를 본 왕이 축객령을 취소하고 이사는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재위 20여 년 만에 진왕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으며 이사는 승상이 되었습니다.
이사의 여러 아들들은 공주들에게 장가들고, 딸들은 왕자들에게 시집갔습니다.
그의 집 앞은 항상 온 나라 고위 관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모든 군현(郡縣)의 성을 파괴하고, 무기를 녹여 보습을 만들게 하고, 왕자나 공신을 세워 제후로 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습니다.
왕족과 공신들이었습니다.
'새 제도는 왕자를 필부로 만들고, 공이 많은 충신이 왕을 보필하지 않으면 왕실이 장구할 수 없다고.'

이사는 바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사학(私學)이 법교(法敎)의 제도를 비난하고, 군주를 비난하는 것을 자기의 명예로 삼고, 취지를 달리하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높다고 생각하며,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비방을 만들어내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군주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그러니 금할 것은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황은 그의 제안이 옳다고 하여 문학과 시서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을 모두 폐기하도록 엄명했습니다.
30일 이내에 이를 행하지 않은 자는 묵형(墨刑)하여 성단(城旦 :아침 일찍 일어나 성을 쌓게 하는 벌)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이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습니다.

이사의 몰락은 최대 권력자의 죽음과 함께 했습니다.
시황 37년 황제가 지방순시 중에 급서하자 환관 출신 측근 조고(趙高)는 유서를 날조하여 장남 부소(扶蘇) 대신 차남 호해(胡亥)로 대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승상인 이사를 도외시할 수는 없어 갖은 설득과 협박으로 그의 협력을 얻어냈습니다.
늙고 우유부단해진 이사는 2세 황제로부터 내침을 당하여 가끔 충정을 상소로 하소연하였으나 그것마저 통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그는 역모로 몰려 시장 거리에서 허리를 잘리는 참형을 당하고, 삼족이 멸망했습니다.
호해를 자결하게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려 했던 조고도 3세 황제에 의해 같은 형벌을 받고 폐족(廢族)이 되었습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 편에서
“이사는 시골 출신의 미천한 자로, 열국 사이를 이간질하여 마침내 진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하고 자신은 삼공(三公)이 되어 부귀와 영화 명예를 누렸으나, 권력에 아첨하고 영합하여 위령(威令)만 엄하게 하고 형벌을 혹독하게 하였다.
그의 충성과 업적을 높이 사는 논의도 있으나 그 근본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보다 100년 쯤 앞선 춘추전국시대에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설파한 장주(莊周, BC365~BC290)도 송(宋)나라에서 아전 벼슬을 지냈습니다.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 장자(莊子)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도둑 무리의 두목 도척(盜?)의 제자가 “도둑에게도 도(道)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도가 있지.
방 안에 감춰 둔 물건을 알아맞히는 것은 성(聖)이고,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勇)요, 뒤에 나오는 것은 의리(義)다.
성공할 것을 예상함은 지(智)요, 장물을 고루 나누는 것은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아직까지 없었다.”
진실한 덕이 아닌 말재간만 늘게 되면, 도척도 성인의 도를 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주는 여러 지방을 주유하여 인망이 높아졌습니다.
초나라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발탁하려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장주는 코웃음치며 말했습니다.
“천금은 큰 이득이요, 경상(卿相)은 훌륭한 지위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오.
제사에 희생될 소는 수년 간 잘 먹고 잘 자라겠지만 결국 태묘(太廟)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가서는 소 같은 큰 짐승보다 살아 있는 돼지라도 되었으면 하고 소원해도 쓸데없습니다.
나는 일생을 속박되지 않고 벼슬 없이 지내렵니다.”

그런 장주가 어느 날 까치가 밤나무 숲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활로 까치를 잡으려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까치는 자신의 위험도 모르고 숲속의 버마재비를 잡으려 정신없이 날아간 것을 알았습니다.
버마재비는 그것도 모르고 매미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밤나무 숲 주인이 나타나 장주가 밤을 따러 온 도둑인 줄 알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장주는 까치 잡을 욕심에 숲 주인이 쫓아오는 것도 몰랐던 어리석음을 뉘우쳐
석 달 동안 뜰 앞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많은 인구 중에 흠결 없고 능력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더러 하늘을 우러러봐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자들도 있었지만 들추어 보면 흠투성이였습니다.
남 흉보기 좋아하고 잘잘못 캐기에 이골이 난 사람 치고 스스로 흠 없는 자도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는 ‘깨끗한 정부’여야 합니다.
나라도 거덜 내고 자신도 망치는 충신보다 흠집 없는 사람이 넘쳐야 장차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될 테니까.


김홍묵 / 연우포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