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7월.
너무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기에 ‘죽음의 산’으로도 불리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5m)를 오르고 내려오던 산악인 박정헌(42)은 7300m 설원지대를 걷고 있었다.
원래는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을 지닌 이 산은 1937년 독일 원정대 16명 전원을 눈사태로 휩쓸어 몰살하는 등
등반사상 최악의 참사를 일으킨 곳이다.
특히 독일 원정대의 한이 맺힌 곳으로 독일은 1934년에도 이곳에서 9명의 목숨을 잃었다.
총 31명의 인명을 삼키고서야 1953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에게 처음으로 정상을 허용한 이 산은
그러나 이후에도 수많은 사고를 일으켜 ‘죽음의 산’ 또는 ‘악마의 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의 여성 산악인 고미영 씨도 2009년 7월 이곳을 올랐다 하산길에 실족해 이 산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극도의 피로 속에 내려오던 박정헌 앞에는 수많은 크레바스가 있었다.
얼음이 갈라진 틈인 크레바스에 빠지면 소리 소문 없이 깊은 얼음 속에 매장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설치해 둔 표지기를 살폈지만 표지기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 길을 잃을 위험이 컸다.
그런 그 앞에 갑자기 어디선가 빛나는 유리마차를 타고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했고 박정헌은 그 여인을 따라 걸었다.
그는 거짓말처럼 크레바스 지역을 무사히 통과해 베이스캠프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 고산지대에 여인이 유리마차를 타고 오는 건 불가능하다.
여인은 누구였을까.
2005년 1월.
히말라야 촐라체 북벽(6440m)을 오르고 내려오던 박정헌은 후배 최강식(33)과 함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최강식이 크레바스에 빠지는 순간 그와 연결한 끈이 자신의 허리를 후려 쳐 갈비뼈가 부러졌다.
최강식은 두 다리가 부러졌다.
천신만고 끝에 크레바스 밖에서 최강식을 끌어 올린 박정헌은 며칠을 굶어 탈진한 채 기어 내려오던 중이었다.
설맹 증상으로 앞까지 잘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저쪽에 자동차가 있으니 함께 타고 가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남자의 제안을 뿌리쳤다.
그 남자는 최강식과 박정헌이 조금 전에 주고 받은 대화를 그대로 따라하더니 자꾸 따뜻한 곳으로 가자고 유혹했다.
필사적으로 그 남자의 유혹을 뿌리친 박정헌은 원주민의 움막을 발견하고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비록 동상으로 손가락 8개를 잘라냈지만.
박정헌은 그 남자가 저승사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대한산악연맹 남선우 부회장(58)은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88년 10월 2일.
에베레스트(8848m) 단독 등반에 나선 그는 8790m 부근에서 산소가 떨어졌다.
산소 결핍으로 말 그대로 극한의 고통 속에 정상을 밟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내려오는데 저 히말라야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한 너무나도 아득했던 목소리.
제트 기류가 몰아치는 지상의 꼭대기에서 신기하게도 너무나 고요히 울려 퍼지던 그 목소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와도 같이 그윽한 여인의 음성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사라졌다.
그는 그 일이 있은 뒤 남이 버리고 간 산소통을 발견하고 목숨을 건졌다.
하산한 남 부회장은 서울에서 아내가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남 부회장은 "아내가 유산을 했다는 시간을 따져보니 에베레스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를 때와 일치했다. 그 목소리는 태아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인 나를 부르던 소리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등정을 달성한 김창호 대장(44)도 이와 유사한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었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숱하게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는 “분명 나 혼자 산을 오르고 있는데 곁에 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져 그와 이야기도 나누고 따뜻한 음료도 나누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누구였을까.
그들이 그곳에서 만난 것은 세이렌(사람을 유혹하여 잡아먹거나 파멸시키는 괴물)이었을까, 혹은 천상에서 내려온 구원의 천사였을까.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모두 올랐던 이탈리아의 전설적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에게도 비슷한 경험담이 있다.
그는 1970년 낭가파르바트를 내려올 때 친동생을 잃었다.
메스너는 당시 동생이 실종된 것을 안 직후 고향의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났으며
그는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어 밤새도록 미친 듯이 동생을 찾아 헤매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동생을 찾지 못한 메스너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으며 자신의 욕심으로 동생을 희생시켰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이 경험한 것을 의학계는 일종의 환각 또는 환청이라고 여긴다.
통상 공기 중에는 질소와 산소가 78 대 21 정도로 분포돼 있다.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기압은 낮아지고 공기밀도도 떨어진다.
고지대에서는 그만큼 산소의 농도도 낮다.
해발 5000m 이상에서는 공기의 밀도가 해발 0m의 절반가량,
8000m 이상에서는 약 3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혈액 속의 산소 농도가 낮아지고 뇌에 공급되는 산소도 그만큼 부족하다.
이때 부족한 산소를 응집시키기 위해 혈액은 좀 더 끈끈해지며 이로 인해 각종 부작용이 생긴다.
때로는 굳은 핏덩어리가 혈관을 막아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
여러 명의 고산 등반가를 치료했던 경기 성남시 분당 차병원 신경외과 조경기 교수는
"고산지대의 환각 환청은 명백히 산소 부족에 따른 뇌기능 이상에 따른 것이다.
산소가 부족하면 뇌기능이 저하되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반면 심리적 요인이 더 큰 작용을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역시 여러 차례 고산 등반에 직접 참여하며 등반대 주치의를 했던 경희대 정형외과 정덕환 교수는
"산소 부족도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요인도 크다.
흰 눈밖에 없는 단조로운 풍경, 위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쇼크와 공포가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킨다고 본다"고 말했다.
산악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심리적 현상이라는 쪽이다.
남 부회장은 “극한의 투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심리적 현상은 아닐까”라고 했다.
하지만 일부 산악인의 의견은 다르다.
단순한 뇌기능 이상이나 심리적 현상이라면 어떻게 환각 속의 인물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정헌은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같은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는 그에게 “그렇다면 과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현상이 있다는 쪽인가”라고 묻자 “그렇다”고 신중하게 답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설명하자면 정말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산에 얽힌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보라.
또 죽음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라.
이런 것들이 말해 주는 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한국은 물론이고 각 나라의 산에 얽힌 신화 및 풍습, 각 민족의 사생관(死生觀) 등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자연 및 우주관을 형성해 가고 있다.
한 예로 그는 “나 같은 경우 산에서 (환각 속의) 여인을 만나면 따라가고 그렇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주요 산의 신은 여신이며 따라서 여인을 만났을 때는 그 산과 등산객을 보호하는 여신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인간의 발길이 드문 고산지대에서의 환각 환청은 일종의 패턴이 있다.
사람의 형상이나 목소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대체로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의 모습, 혹은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죽음에 맞닿을 정도로 고통스럽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이 마주하길 원하는 것은 그리운,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바람 치고 눈 쌓인 세상의 끝에 섰을 때 그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확인한 것은 극한의 외로움이며,
그 외로움의 끝은 결국 사람을 향한 그리움으로 통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극단의 도전에 나섰던 사람들은
결국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품고 다시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이원홍 / 동아일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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