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여쁜 젊은 아가씨였고, 장래성도 밝았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악명높고 부도덕하며, 과격한 기질의 도둑이자 살인자인 윌리엄 머니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심장발작을 일으켰었다. 그녀는 어머니 상상과는 달리, 그의 손에 죽지 않았으나, 천연두(smallpox)로 생을 마감했다. 그때가 1878년이었다.
1880년 와이오밍주, 빅 위스키(Big Whiskey Wyoming). 윌리엄 머니(William Munny: 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은퇴한 무법자다. 열차와 은행을 털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잔혹한 살인자로 악명을 떨치던 과거에서 떠나 총과 술을 놓은 지 어언 11년, 이제는 캔사스의 촌구석에서 아들, 딸과 함께 돼지나 키우고 조용히 살고 있다. 그런 머니의 새로운 인생을 가능하게 했던 아내는 죽고 돼지들이 전염병으로 죽자 생활고에 시달린다.
이때, 어느 두 카우보이가 창녀에게 칼을 휘둘러 얼굴을 흉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곳의 부패한 보안관 리틀 빌 대거트(Little Bill Daggett: 진 핵크만 분)는 말 몇필만 받고 그들을 풀어주었다. 이에 화가 난 창녀들은 그 두 악당에게 1천불의 현상금을 걸었고 새파랗게 젊은 스코필드(The Schofield Kid: 제임즈 울벳 분)가 돈을 노리고 동업자로서 머니를 찾아온다.
이에 머니는 함께 떠나기로 하고, 옛날에 함께 일하던 흑인 총잡이 레드 로건(Ned Logan: 모건 프리먼 분)을 데리고 간다. 로건 역시 무법자의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살고 있었으나 머니의 부탁으로 따라나선다. 세 사람은 빅 위스키로 향하고 있을 즘, 열차에선 비열한 총잡이 잉글리쉬 봅(English Bob: 리차드 해리스 분)이 마을에 들어온다. 그러나 보안관에게 잡혀 폭행을 톡톡히 당한 채 쫓겨난다. 이때 같이 왔던 작가 보상(W.W. Beauchamp: 소울 루비넥 분)은 소설 소재를 얻기 위해 마을에 남게 되고,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데.
몇 해가 지난 뒤, 안소니아 페더스(Ansonia Feathers) 부인은 몹시 힘든 여행을 거쳐 그녀의 유일한 딸이 있었던 마지막 장소인 호즈먼 카운티(Hodgeman Contry)를 방문하였다. 윌리엄 머니는 오래 전에 그의 자식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곡물 산업으로 성공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페더스 부인은 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악명높고 부도덕하며 과격한 기질의 도둑이자 살인자인 그와 결혼했는지 설명해주는 어떠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감독으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진정한 시작은 아마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탁월한 작품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는 지루함을 말할 것이고 어쩐지 무기력한 느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드는, 무엇이 악이고 선인지를, 과연 선이라는 것이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는 ‘용서받지 못한 자’는 지치고 피로한 느낌으로 가득하면서도 서정적이기도 한 작품이었다.
특별히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같지만 무척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1880년
한때는 악명을 떨쳤으며 기분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항상 술에 취해있던 삶을 산 윌리엄 머니
하지만 이제는 늙고 지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인
제대로 총도 쏘지 못하게 되었을 정도로 노쇠하게 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
그런 윌리엄 머니에게 향해진 제안은 자신의 곤궁한 처지로서는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악명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윌리엄 머니는 누군가를 죽이러 그리고 그 스스로를 반성하며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서부극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할 것인지를
그간의 서부극이 만들어냈던 신화를 그 신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어떤 식으로 뒤집고 있으며 새롭게 이해시키려고-이어지도록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반성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고 있다.
조금은 느슨한 진행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느슨함 속에서 도덕, 반성, 거짓과 진실, 진심, 선과 악,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 분노, 용기 등등 여러 가지를 인상적으로 펼쳐놓고 있다.
이런 식으로 서부극은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 재해석과 재검토는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그걸 시작한 사람이 서부극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어떤 무게감을 그리고 신중함과 진지함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깊은 품격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