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세성사 ◆ | ||
한자 | 聖洗聖事 | |
라틴어 | Baptismus, Baptisma | |
영어 | Baptism | |
성세 또는 세례([그] baptiama). 물로 씻는 예식으로 이루어지는 세례, 즉 수세는 가톨릭 교회의 성사이며 가견적(可見的) 교회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단체에 입적(入籍)하는 입문성사(入門聖事, 성세 · 견진 · 성체) 중 최초로 받는 성사이다. 따라서 이 성세를 받아야만 비로소 교회의 기타 성사들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성사이다. 성세라는 관문을 통함으로써 영세한 자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교회의 모든 성사들이 그렇듯이 이 성세성사도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설정하신 은총의 표지이며 이 표지가 상징하는 은총은 모든 인류에게 미쳐진 죄(罪)와 인간 각자가 스스로 범한 죄[本罪]와 그 벌까지 온전히 사함을 받고 영신적으로 재생되어 하느님의 자녀[義子]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되고 그리스도를 닮은 새 사람으로서 천국의 상속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성세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함께 머무르시는 궁전이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참된 자녀로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영원한 사랑의 속삭임의 생활을 영유하게 된다. 이 성세야말로 인간이 의화(義化)됨을 표징하는 외적 표지로서 법적인 의미로서뿐 아니라, 실질적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의 단체에 입적됨을 표시한다. 이는 마치 새로 태어난 어린 아기가 자기 부모로부터 성명을 받아 호적에 올려짐으로써 한 인간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성세로써 이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결속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성신의 힘으로 제사와 경신례를 올리며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 하며 일생을 그리스도교인 차원에서 생활할 수 있는 영구적 보증으로서 인호를 받는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성세관이다. 성세의 기원은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함께 실천되어 왔고 세례 없는 그리스도교의 창설시기란 없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신자란 곧 세례를 받은 자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세례는 그리스도 교회인 신앙공동체와 더불어 생겨났다. 성신강림의 기적적 사건으로 신약의 백성인 교회가 시작될 때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사도 2:38) 하고 외친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그 곳에 모였던 자들이 주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사도 2:14-42 참조). 바울로 사도도 예수가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개종할 때 다마스커스에서 세례를 받았음은 자명한 사실이며(사도 9:19) 그의 여러 서간들 안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음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한다(로마 6:3, 1고린 1:13-15, 2:13, 6:11). 이러한 사실은 세례가 초창기 교회에서부터 실시되어 온 자명한 관습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창기 교회로부터 시행된 세례의 기원의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의 해답은 헬레니즘시대에서 유래된 청결예식(Lustratio)이나 아직도 논란되고 있는 유태교 개종세례(Baptismus Proseliti)에서 찾을 수 없고 세례자 요한의 독창적 세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학자들의 정견이다.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 루가 3:3)로서 그의 외적 양식은 수세자 스스로가 씻는 자아세례도 아니며 '쿰란' 특수 단체에서 시행되는 목욕세례도 아니었다. 요한의 세례는 어느 특수단체에 입적하는 양식으로 받던 세례의 상황을 초월하는 독창적 창안이며 이는 그 당시 최후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예언적이며 종말적 자아의식에서 발로된 것이다. 즉 최후 심판이 시작되는 세상 종말 전에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사죄는 하느님께만 가능한 것이며 하느님은 자기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당신께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죄를 사해 준다는 것을 표지적으로 나타낸 예식이 요한의 세례이다. 요한의 세례는 할손된 유태인들에게도 권유되고 주어졌다는 점에서 구약의 계약의 백성으로서의 배타적인 단체인 이스라엘 선민의 한계가 근본적으로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한 속죄와 사죄로서 종말적이며 구원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이로써 새로운 세대, 즉 신약의 주인인 예수의 구원사상을 예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은 "나는 당신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예수)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마르 1:8). 예수 자신도 요르단강에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때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임하셨다.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마르 1:9-10, 마태 3:13-17, 루가 3:21-22). 예수의 제자들은 요한 세자의 제자들이었다는 사실로(마르 1:7, 요한 1:35-37 참조) 미루어 보아서 이 시기에는 예수도 요한 세례자와 함께 요한의 세례를 계속 주었다고 볼 수 있다(요한 3:22-23, 4:1-2 참조).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세례는 당신의 부르심을 듣고 당신과 관계를 맺기 위한 준비의 성격을 지녔다고 보아야 하므로 그 후 얼마 안 되어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본다.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는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마르 1:14-15) 하고 설교하면서 요한의 세례에 대한 권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독특하고 고유한 권한도 주장하신다(마르 11:29-33). 예수는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러 왔지만, 그 구원은 어느 의식의 매개가 아니라 당신이 창설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말과 행동으로 죄를 사해준다(마르 2:15-17, 루가 15:1-7 참조). 예수가 보증하는 사죄는 가까이 도래한 종말적 심판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서이며 예수가 설교하는 회개는 어느 율법이나 제사의 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완전 귀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 귀의하는 회개로써 성령의 힘을 통하여 사죄함을 받고 예수와 만나는 화해로써 평화를 얻으며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는 새로 나야 하고, 새로 나는 표지요 방법은 물과 성령인 것이다. 예수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한 3:3). 이미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대답하였다. 이 대화에서 예수의 근본 사상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나고'(요한 1:13)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근본사상에서 볼 때 예수 자신이 세례 명령이나 자기 공동체에 입적하는 입문의식을 친히 확정지어 준 것이 아니라, 이 사상을 바탕으로 성신의 강림을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례의 관습을 받아들여 시행하면서 이것이 부활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요 이로써 주님의 뜻을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그 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전제하며 그 신앙의 표현양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세례의식을 받아들이게 된 초기 공동체의 결단 동기는 그 당시에는 전에 예수가 근본적으로 배척한 유태교의 외형적 형식과 율법 준수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여기저기서 차츰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마치 요한의 세례가 가까이 도래한 종말적 구원사상에서 생겨났듯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신의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 사건들을 종말적 사건의 발단으로 생각하고 이제 최후의 심판자가 문전에 다가왔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이에게 "회개하시오.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고 한 것은 당연했으리라 생각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례[水洗]를 받는 자는 그를 충만케 하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 각자가 탈혼적 현상이나 어느 특별한 영신적 체험을 통하여(그러한 경우가 때때로 있다손 치더라도)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성령은 공동체에 하사되고 각자는 세례를 통하여 그 공동체에 받아들여짐으로써 그 성령을 받으며 공동체의 경신 행위에서 그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사도 19:1-6, 1고린 12:1-13, 14:1-33 참조). 또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세례를 받기 위하여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하며(로마 10:14-16)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없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 속한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어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6-27). 이와 같이 동일한 의화의 내용을 한번은 신앙에, 한 번은 세례에 적용할 만큼 신앙과 세례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원자인 메시아로, 또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고백할 때 세례를 주었고(로마 10:9-10, 사도 8:35-39 참조) 예수의 이름으로 받던 세례란 이러한 신앙의 표현이다. 믿음을 통한 세례와 구원을 연결시켜 바울로 사도는 수세는 구원신앙의 표현이며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세례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다(로마 6:3-11, 1고린 1:13 참조)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준 세례는 구원론적 차원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그의 신앙 공동체인 교회와의 일치에 역점을 둔 하나의 입문적 의식으로 이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생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하여 그의 이름으로 주던 초대 그리스도교의 수세식은(사도 8:16, 19:15, 1고린 1:13-15 참조) 바로 그리스도교의 특성과 신학을 드러낸다. 후대에 생겨난 삼위일체적 성세양식(마태 28:19)은 '예수의 이름으로' 주년 세례의 단순양식의 신학적 확장이다. 그 후대에 오면서 세례의 양식은 각 지역의 전례형태 안에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시리아 전례형태 안에서는 예비자들을 위한 예식(안수, 마귀를 끊어버림, 십자표)으로 시작하여 신앙 고백을 한 후 영세대에서 세 번의 침례를 하면서 '죄가 씻겨진다'라고 수동형으로 표현했는가 하면, 알렉산드리아 전례형태 안에서는 '누구를 씻긴다'라고 능동형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로마 전례형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구원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을 주례자와 수세자 사이에 질문 응답식으로 시키면서 세례를 주었다. "당신은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습니까?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등의 성삼위에 대한 신앙고백을 시켰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라는 삼위일체적 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동방교회에서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몹스에스타의 테오도로, 서방교회에서는 에우세비오 시대부터다. 그래도 질문 응답의 신앙고백 양식은 6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동서방교회가 서로 조금씩 달리 발전되어 오다가 본 세례식과 영세 예비자들을 위한 예식(십자표, 안수, 구마경) 세례의 뜻을 상징하는 예식(기름 바름, 흰옷, 촛불 - 서방교회에서는 5세기부터 실시함)을 통합한 세례예식을 만든 것은 9세기경부터였다. 그 당시에는 주로 유아세례였기 때문에 이 간편한 예식이 일반화되었다. 물로 씻는 방법도 초창기부터 온 몸을 물속에 담그는 침례식이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성세대는 원형이거나 8각으로 된 목욕통 형태였다. 그러나 병자나 다수의 영세자들을 위해서 물을 뿌리는 방법도 있었고 이미 일찍이 물을 부어서 주는 세례방법이 있었다. 동방교회나 밀라노 전례형태를 제외하고는 침례식은 15세기에 완전히 없어지고 물을 부어서 하는 양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세례양식이 유아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예식은 초대 교회에서 사용되던 어른 예식을 축소시켜 만든 예식으로서 어린이의 실질적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는 기형적 예식이 되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어린이를 위한 세례예식과 성인을 위한 입교예식을 따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전례헌장 66, 67항). 이에 근거하여 1969년 5원 15일자로 어린이 세례 예식서가 공포되었고 1971년 1월 6일자로 어른 입교 예식서가 공포되었다. 교회법적으로는 자연수로써 물을 부어서 씻든(주부식) 혹은 온 몸을 담그어서 씻든(침례식) 또는 뿌려서 씻든 수세자를 물로 씻기면서 교회의 올바른 지향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는 삼위일체적 형식을 사용해서 준다면 유효한 세례다. 이와 같이 집전된 세례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건 또는 밖에서 이루어졌건 다 같이 유효하다. 전례적으로 규정된 모든 예식과 예절에 의해서 집전되는 세례는 성대한 세례라 한다. 성대한 세례의 정상적 주례자는 주교, 사제, 부제이다. 그리고 죽을 위험 중에 물로 씻기면서 성삼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대세라 한다(단순세례). 이러한 경우에 가능하다면 교회의 회장이 주는 것이 좋으나, 위급한 경우에는 아무 신자나 줄 수 있고 신자가 없는 경우라면 신자가 아닌 사람도 교회의 지향으로 주면 유효한 세례다. 성세성사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죽은 사람 외에는 누구나 받을 수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심이 나면 조건부 세례를 줄 수 있다. 대인 영세자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익혀 신앙을 고백한 후 세례를 받아야 한다. 철이 나지 않은 어린이는 부모와 교회 공동체의 신앙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 신자 부모는 자기 어린이의 세례식에 참여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어린이의 장래 신앙교육의 책임을 진다. 따라서 유아 세례의 경우 가능한 한 산모가 자기 자녀의 세례식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하여 회복기간까지 세례를 연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유아가 죽을 위험 중에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세례를 주어야 한다. 성인이건 유아이건 수세자에게는 대부, 대모를 세워 부모와 함께 그의 장래 신앙생활을 돕게 한다. (崔允煥) [참고문헌] E.J. Dolger, Exorcismus im altchristlichen Taufritual, Paderborn 1909 / F.J. Leenhardt, Le bapteme chretienne, son origine, sa signification, Neuchatel-Paris 1946 / A. Stenzel, Die Taufe, Innsbruck 1958 / J. Jeremias, Die Kindertaufe in den ersten vier Jahrhunderten, Gottingen 1958 / J. Jeremias, Die Anfange der Kindertaufe, Munchen 1692 / G.R. Beasley-Murry, Die Christliche Taufe-Eine Untersuchung uber ihr Verstandnis in Geschichte und Gegenwart, Kassel 1968 / R. Schnackenburg, Taufe: LThK 9, pp. 1311-1314 / Concilium (Internatonale Zeitschrift fur Theologie): Nijmegen 3 (1967/2). Liturgisches Jahrbuch: 21 (1972/2) / Codex Juris Canonici auctoritate Joannis Pauli II promulgatus, Liber IV, Pars I. Titulus I, Vatican City 1983/ Ordo Baptismi Parvulorum, Roma 1696; 한국어 번역본 : 어린이 세례식 예식서, 왜관 1976 / Ordo Initiationis Christianae Adultorum, Roma 1972; 한국어 번역본 : 어른 입교 예식서 왜관 1976/ 성세성사 : 사목 특찬 39(1977. 5) 최윤환, 새 聖洗 禮式書에 관한 고찰 I, II, III, 사목, 51 (1977. 5), pp.49-61, 52(1977. 7), pp. 78-87, 53(1977. 9), pp. 11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