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만물상] 청와대에 간 축구 소녀들

뚜르(Tours) 2010. 10. 2. 12:33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김대중 대통령 환영 만찬을 열었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도 휠체어를 타고 손님으로 참석했다. 그가 대통령들에게 인사하려고 휠체어에서 일어난 순간 바지가 흘러내렸고 속옷을 입고 있지 않던 아랫도리가 노출됐다. 언론은 "백남준이 일부러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조롱한 것 아니냐"고 썼다.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여사는 얼마 전 회고록에서 "그 해프닝은 의도된 게 아니었다"고 했다.

▶가수 조영남이 1980년대 어느 날 청와대 행사에서 노래하다 1절을 마치고 간주가 나오는 사이 갑자기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청와대 경호팀이 순식간에 무대 위로 올라가 조영남을 제지했다. 조영남은 하모니카를 꺼내려 했지만 경호원들은 대통령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무기를 뽑아들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연예기획사 JYP 대표인 가수 박진영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회의에 하얀 가죽바지, 속이 훤히 비치는 망사 셔츠 차림으로 갔다. 180여 참석자 중 그 혼자만 양복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박진영은 자신을 보고 웃음 짓는 대통령을 바라보며 "가수가 이런 의상을 입으면 안 되느냐. 대한민국은 사회는 진보적인데 문화는 보수적"이라고 했다.

▶민주국가든 독재국가든 최고권력자가 참석·주재하는 행사는 엄숙하고 권위적인 분위기로 흐르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경호원들 눈초리에 주눅 들어 외부 인사들은 기를 펴기조차 어렵다. 17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우승한 우리 소녀 축구 대표 선수들이 엊그제 그 묵은 관행을 '하이킥'해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 초대로 청와대 영빈관에 간 선수들은 남자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깜짝 공연이 시작되자 일제히 무대 앞으로 몰려나가 환호했고, 무대 위로 올라가 춤까지 췄다. 청와대측은 "마치 콘서트장 같았다"고 했다.

▶청와대는 소녀들이 워낙 열광하자 샤이니 공연 뒤에 예정했던 대통령 마무리 발언도 생략하고 선수들이 충분히 여흥을 즐기도록 했다. 등록 선수가 1400여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 여자축구가 세계를 제패한 원동력으로 거침없는 도전정신과, 어느 강자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대담함이 꼽힌다. 대통령의 위엄 앞에서도 자기들의 끼와 감성을 솔직히 마음껏 드러낸 축구 소녀들을 보며 버릇없다고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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