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古今

'전투수당' 하루 1달러

뚜르(Tours) 2014. 5. 7. 09:42

난 젊음을 불태우며 살았습니다.
단 한 번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못 배운 無識, 못사는 우리나라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볼펜으로 정갈하게 쓴 장문의 편지였다. "채명신 파월사령관 전기(傳記)를 펴낸 박경석 예비역 장군 인터뷰를 보면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정말 감격스럽게 읽었습니다"로 시작됐다.
하지만 단순히 한 독자의 감상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분이 내 대대장님이었고, 고(故) 강재구 소령은 중대장님이었으니까요.
파월(派越) 직전 중대장님이 숨진 수류탄 사고는 함께 훈련하던 중 일어났지요.
중대장님은 가운데, 나는 좌(左)에서 두 번째, 잘못 던진 박 일병은 오른쪽에 있었지요.
둑 너머로 던진다는 것이 그만 던진 자리로 떨어져 엄청난 일이 벌어졌지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히 떠오르는군요."

그러면서 그날의 일기(日記)를 편지에 소개했다.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내 일생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자, 이 수류탄의 위력을 봐라.’ 큰 소리로 수류탄 투척 요령을 일러주시던 강재구 중대장님이 불과 몇 분도 되기 전에 부하 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내 동료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려다 그만 실패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사랑하는 부하들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낸 ’인간 강재구 대위님’, 나는 그 위대한 희생정신을 하늘같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제법 어른스러운 감상까지 덧붙였다. "신병중대 때부터 나와 같이 붙어 다니던 박○○도 부상을 당해 후송을 갔다. 그가 찼던 탄띠를 힘없이 둘러메고 귀대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또한 그렇게도 인자하고 근엄했던 중대장님을 이제 볼 수 없게 됐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편지를 보내온 그는 경기도 김포에서 농사짓던 집안의 9남매 중 넷째로 출생했다. 겨우 중학교를 마쳤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원망보다 키워준 고마움이 더 컸다고 한다. 그는 관공서 급사로 일하다가 입대했다. 월남 파병 부대에 지원한 것은 "다른 이유보다 그때 젊음의 기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전투 보병으로서 ’맹호 5호 작전’ 등 두 차례 사단급 작전에 참여했다.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전투 직전의 긴장감도 일기에 나와 있다.

"1966년 1월 18일 화요일 맑음. 대대장님이 우리 쪽으로 오시더니 중대장님에게 ’비겁하게 후퇴하는 자 있으면 쏴! 내가 책임진다!’고 명령했다. 자그마한 대대장님의 허리에 찬 권총이 오늘 따라 꽤 커 보인다."

당시 채명신 파월사령관은 적진(敵陣) 한가운데로 헬기를 타고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일일이 사병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악수하는 모습에 그는 "이런 분 휘하에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영광이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채명신 파월사령관의 그때 연설을 적어놓았다.

"여러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은 애국자다. 지금 우리가 흘리는 피와 땀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발전해가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여러분이 받는 전투수당을 아껴 본국에 송금하면 그 돈으로 외국 빚도 갚고 나라 살림도 살이 찐다. 지금은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먼 훗날 지금 여러분이 흘리는 땀과 희생은 반드시 기억되고 보상을 받을 것이다."

사병의 전투수당은 하루 1달러였다. 그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송금했다고 한다. 그가 1967년 10월 귀국 전역했을 때 국내에는 무장 공비(共匪)들이 빈번하게 출몰했다. 후방의 국가 주요 시설 보호를 위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을 뽑았다. 그는 자동 카빈 소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채 경춘선의 강촌 구간 철도를 지켰다고 한다.

그러던 중 파독(派獨) 광부 모집 공고를 봤다. 그는 "월남전에서도 살아왔는데 두려울 게 뭔가. 바깥세상의 큰물을 한번 먹어보자"며 지원했다. 그는 1970년부터 딘스라켄 근방의 탄광에서 일했다. 의무 계약 기간 3년 동안 결근이나 병가(病暇) 한 번 없었다. 휴일에도 쉬지 않고 일했고, 심지어 8시간 근무를 마친 뒤 지상에 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탄광에 들어가는 ’더블 근무’도 했다고 한다.

"내게는 집안 배경도 학벌도 없었어요. 오직 가진 것이라고는 젊은 몸뚱아리뿐이었으니까요. 살기 위해 죽어라고 일했지요. 그때 집에 보낸 돈으로 부모님은 전답을 장만했고, 여동생들은 학교를 마칠 수 있었지요."

그는 1976년까지 연장 근무를 했고, 거기서 만난 파독 간호사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귀국 후에는 건축업을 했다.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야말로 젊음을 불태우며 살았습니다. 단 한 번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못 배운 무식, 못사는 우리나라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바쁘신 분에게 너무 긴 편지가 되고 말았네요. 수원에서 이범영 올림."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평범하지만 비범했던 사람의 육성(肉聲)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중에서


그가 독일 탄광에서 근무했다는 Dinslaken.
작은 촌입니다.
1970년, 나도 같은 해에 독일정부초청 장학생으로 가서  D
inslaken에서 어느 독일광부집에서 하숙하며 3개월간 독일어를 배우며 살았습니다.
그곳 병원에는 한국에서 온 간호원들도 10여명이 있었고
유도사범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녁마다 만나서 맥주잔을 앞에놓고 고향생가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아 , 옛날이여 !


 /박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