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편의 詩

등에 핀 능소화 /정용화

뚜르(Tours) 2018. 9. 21. 00:34

 

 

등에 핀 능소화

 

                                     정용화

 

 

종이에서 뜯어낸 꽃 속에서

여름이 흘러 나온다

20개의 태양을 등에 지고

지붕 위에 앉아있는 여자들

 

나무들은 초록커텐을 드리우고

제대로 피지 못한 꽃의 시간을 미리 꺼내

이파리마다 비밀 하나씩 묻히고

돌아서는 바람의 처세술

 

한사코 거부하는데도

기어코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불시착한 꽃마다

이미 고백을 머금은 입술이어서

영문도 모른 채 살짝 손을 얹었는데

와락 안겨오는 외로운 몸들이여

 

필사적으로 달아오르고 무르익기도 전에

이미 소진된 사랑이여

 

고여있던 설움이 몸안에서 전구를 켠 듯

환해질 때 여름은 완성된다

찢겨진 일력처럼 주홍빛 낱장으로

뭉턱뭉턱 떨어져내린 여름

 

한차례 지나가는 소나기에

고 작고 붉은 종들이

힘닿는 데까지 맑은 소리를 내어준다

 

 

계간시담(2016년 여름호)

 

출처 :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61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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