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or(莊園)

배론성지 순례

뚜르(Tours) 2008. 10. 7. 18:04

 

배론 성지 순례

 9월 28일, 순교자성월 마지막 주일에 상계동 성당 견진교리자들과 함께 제천 배론성지 순례를 했습니다. 상계동 견진교리신자들과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하는 성령세미나 총팀장을 맡은 관계로 뜻 깊은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비신자, 견진교리신자들이 성지순례를 통하여 신선한 충격과 진한 감동을 받아 견고한 믿음을 얻게 됨을 김구희 세례자 요한 신부님께서는 아시고 이번 순례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배론 성지는 교우촌이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산과 계곡으로 깊숙히 숨어들어야 했던 신앙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룩한 곳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묘소가 있고, 1855년에 세워진 배론 신학당이 있는 이 성지를 오랫만에 순례하게 되어 몹시 기뻤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며 가족들, 친척들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은 이곳에서 옹기를 구워 생계를 꾸렸고, 옹기를 지게에 지고 이곳 저곳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며 전교를 하고 가족들의 소식을 수소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인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입니다. 창원(昌原) 황씨 황사영(黃嗣永)은 나이 1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이 친히 손목을 잡아주고 20세가 되면 등용(登用)을 약속할 만큼 세상의 부귀영화가 보장된 장부였습니다. 그는 한학을 수학하기 위하여 당대에 유명한 마재의 정약종(丁若鍾) 선생 문하로 들어갔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이 천재 소년에게 천주학을 가르쳤습니다. 벼슬도, 세상 부귀영화도 모두 버린 사영은 알렉시오라는 본명을 얻었습니다. 정약종 선생의 맏형 정약현의 딸 난주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들 경한(敬漢)을 낳았습니다. 1801년 정순왕후 김대왕대비가 일으킨 신유박해(辛酉迫害)가 터지자 사영은 배론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해 5월 31일 주문모 신부님의 처형 소식을 들은 사영은 토굴에 들어 앉아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탄원서를 쓰는데, 가로 62cm, 세로 38cm 하얀 비단에 깨알같은 한문 정자로 13,384자를 썼습니다. 황심 토마스가 북경으로 이 백서를 전하러 가다 의주에서 잡힘으로서 사영은 대역부도죄인으로 27세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영의 홀어머니는 거제도 관비로,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관비로, 외아들 경환은 추자도에 버려집니다. 추자도(楸子島) 산중턱 한켠에 먼 바다를 바라보며 황량히 누워있는 묘(墓)가 있으니, 이는 제주도로 귀양 간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제주도를 바라보는 경한의 묘입니다.

 

사영은 백서(帛書)에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죄목으로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가까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유배를 당하여 그 시신을 수습할 사람조차 없었던지 사영의 무덤은 집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180년이 지난 1980년에 황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史界)의 고증을 거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합니다.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비단 띠는 정조대왕이 손목을 잡아주자 그 손목을 감싸고 다녔던 비단으로 추정됩니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장흥의 모텔 옆 묘에서 쓸쓸히 누워계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황사영 순교자를 무척 공경합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장원급제한 천재요, 헌헌장부요,  풍운아인 황사영은 세상의 무상함과 천상의 영복을 대변하는 순교자입니다.

양박청래의 주장이 신앙과 반역의 경계를 허물지 못하고 시복청원에서 배제되어도, 그는 분명 천상교회에 계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배론 성지에서 드리는 미사는 나 자신을 돌아 보게 하는 장엄하면서도 천상을 넘나드는 신비한 미사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묘소 앞에서 견진 교리자들과 함께 신부님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애틋한 자식 사랑과 배교와 순교의 이야기를 들려준 배론의 하루는 정말 멋진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성모님 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한 순례여정이었습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의 교리로 우리는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니 성지 순례는 천주교 신자로서 누리는 은총임에 틀림 없습니다.

 

2008.10. 8

 

Mart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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