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신앙과 조국, 무엇이 먼저인가

뚜르(Tours) 2013. 6. 8. 11:15

 

[재평가받는 천주교인 황사영·안중근… 교회, 聖人 전단계 '시복' 추진]

-신앙 위해 조국을 등진 황사영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 심해지자 "정부 위협할 서양軍 보내달라" 1만字 넘는 편지 보내려다 처형
교계 "평등 실천하려한 개혁가"

-조국 위해 신앙을 거스른 안중근
'살인하지말라' 가톨릭 계율 어겨 교회에선 한동안 업적 외면받아
"일제 침략에 맞선 정당방위였다" 김수환 추기경 발언 뒤 復權 활발


	황사영이 백서를 쓴 충북 제천 배론성지 토굴.
황사영이 백서를 쓴 충북 제천 배론성지 토굴. /경향잡지 제공
신앙의 자유를 위해 베이징 주교에게 '백서(帛書)'를 보내 외세 개입을 요청하려 했던 황사영(1775~1801). 망국의 위기 앞에 종교적 규율을 뛰어넘어 침략 원흉을 사살한 안중근(1879~1910). 한 사람은 신앙을 위해 국가에 등을 돌렸고, 다른 한 사람은 국가를 위해 '살인하지 말라'는 신앙의 계율을 어겼다. '신앙과 조국'이라는 두 가치 중 어느 한 가치에 더 집중했던 것. 한국 천주교회는 황사영과 안중근 의사 모두에 대해 시복(諡福·성인이 되는 시성의 전 단계)을 추진 중이다〈〉.

황사영 : '반역자' 혹은 '순교자'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라. 어떻게 해서든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 16세에 진사가 된 신동 황사영에게 정조(正祖)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황사영은 출세 대신 신앙을 택했다. 겨우 움튼 조선 교회가 박해로 찢겨 나가자, 그는 충청도 제천 배론(舟論)의 토굴 속에 숨어들었다. 이때 가로 세로 약 62×40㎝의 흰 명주 천에 깨알같이 작은 해서체로 쓴 1만3384자의 편지가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려다 실패한 '백서'다. "백성이 박해에 걸려 죽을 고통 속에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빨리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황사영은 박해 상황 등을 적은 백서 끝 부분에 ▲교황이 청나라 황제를 통해 외교적 압력을 행사케 할 것 ▲서양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만~6만명을 파견해 조선 정부를 위협할 것 등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았다. 체포된 황사영은 '반역죄'로 처형됐다. 당시엔 처삼촌 정약용조차 "나라에 대한 반역"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이런 황사영에 대해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천주교회는 지난 3월 황사영을 133위 순교자 시복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지난 1일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위 주최로 '황사영의 신앙과 영성' 심포지엄도 열렸다. 참여 학자·사제들은 황사영의 죽음이 '순교'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종교를 위해 나라를 버렸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지만, 당시 박해를 고려할 때 달리 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박동균 신부(서울대교구 반포4동 본당 주임)는 "사회 구원, 민족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백서는 하나의 인권선언서로, 황사영은 차별 극복의 평등 실천가, 전제 군주제를 비판한 개혁가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황사영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병란 도모이자 반역이라는 점은 사실"(박광용 가톨릭대 교수)이지만, "당시 조선의 천주교 탄압이 인간 존엄성과 공동 선(善)을 거스른 것이라면 황사영의 행위 역시 불가피한 저항으로서 도덕적 정당성을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장 유경촌 신부)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황사영 알렉시오 (1775~1801), 안중근 토마스 (1879~1910).
안중근 : '살인'에서 '의거'로

1909년 11월 중국 뤼순 감옥, "천주교인이 어찌 사람을 죽이느냐"고 빈정거리는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에게 안중근 의사는 답했다.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한다면 그것이 더 큰 죄다." 안 의사는 자서전에 거사 성공을 위해 매일 아침 기도를 했고, 이토 사망을 확인한 뒤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썼다. 하지만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1854~1933) 주교는 "천주교인은 살인에 관계하지 않는다, 안중근은 신앙에서 이미 멀어져 있던 사람"이라고 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해방 직후인 1946년 노기남(1901~1984) 당시 주교가 안 의사 추모미사를 공식 집전하며 전환점을 맞는다. 1993년 8월에는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이 안 의사 추모미사 강론에서 "일제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구책으로 행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 의거로 봐야 한다. 일제 치하 한국 교회 어른들이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려 여러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연대적 책임감을 느낀다"고 언급하면서 재평가 움직임도 탄력을 받았다.

지난 3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안 의사 순국 103주년 미사에서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가 안 의사에 대한 시복 운동 추진을 공식화했다. 염 대주교는 "안 의사의 독립투쟁과 의거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생애와 일치시키고자 노력했던 신앙의 연장이며,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