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us' Opinion

`명·계·남`에 대한 유감 / 펌

뚜르(Tours) 2008. 3. 26. 10:15

 

아직도 눈에 선하다.
4년 전 일이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초선 의원 의정 연찬회’가 열렸다.
17대 총선의 관문을 뚫고 당선한 새내기 국회의원 187명이 모였다.
기업으로 치면 신입사원 연수교육에 해당하는 행사다.

진작에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사실상 의정활동을 마감하는 6선의 박관용 국회의장이
환영사를 마친 뒤 당선자들과 악수를 하려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가나다 순으로 좌석을 배치해 첫 상대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당선자였다.
그러나 박 의장이 내민 손은 민망해 어쩔 줄 몰랐다.
악수를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포도주.
농민 몫 비례대표인 강 당선자는 “박 의장이 며칠 전 경제단체장들과의 모임에서 칠레산 와인으로 건배해 농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어떻게 그런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나중에 박 의장은 사석에서 “그때 그 순간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회고했다.

권위의 파괴는 보는 순간 통쾌하다.
그러나 그 통쾌함은 파괴의 논리와 명분이 빈 자리를 채웠을 때 정당해진다.
17대 국회는 초선의 비율이 62.5%였다.
초선이 가장 많았던 13대 국회(56.5%)보다도 높은, 역대 최고였다.
1988년의 청문회 정국에서 국민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긴 건 13대 초선 의원들이었다.
노무현, 이해찬, 이인제 등이 그들이었다.

기대대로라면 전체 의석의 3분의 2 가까이를 초선들이 차지한 17대 국회는
역대 국회 중 가장 개혁적이고 역동적이어야 했다.
과연 그랬는가.

역대 가장 늦은 예산안 통과(2004년) 등의 기록은 많다.
17대 국회의 초선 의원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숫자만큼 부실했다는 평이다.
3김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한 새 보스의 그늘 속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감췄다.
자신들만의 활동 공간을 만들지도 못했고, 리더를 키우지도 못했다.
통과시킨 법안은 많았지만 혜택받고 보호되는 서민은 그만 못했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물갈이가 화제다.
총선 때마다 되풀이되는 물갈이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가 돼버렸다.
선수(選數)가 높으면 높을수록 양복 깃에 단 금배지의 무게가 거추장스러운 세상이 됐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을 ‘부정·비리 전력자’란 기준으로 내친 민주당의 공천은 쿠데타로,
영남권 현역 의원 25명을 무더기로 내친 한나라당의 공천은 중진 학살이란 수식어로 포장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드라마라고 감동하긴 이르다.
우리가 눈여겨 볼 건 쫓겨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자리를 대신 채우겠다며 들어서는 사람들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구악을 물갈이한 결과가 신악이라면 비싼 대가를 치르고 물을 갈 이유가 없다.
수족관의 물을 가는 건 혼탁한 물 대신 깨끗한 물로 수족관 속 물고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총선 물갈이가 포장만 바꾸는 것이라면 ‘수십 년의 관료 생활로 무장된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선 풍부한 의정 경험을 가진 의원이 더 유용하다’는 논리를 반박할 방법이 없다.

한나라당 공천 결과를 놓고 ‘명·계·남’이란 말이 등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계보만 살아남고 있다’는 얘기다.
벌써부터 많은 ‘명계남’들은 공천 과정에서 “누가 뒤를 봐준다” “누가 추천했다”는 꼬리표를 꽁무니에 달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먼 민주당의 공천도 그래서 진통을 겪고 있다.

치열한 공천 경쟁을 뚫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더 강한 접착제의 꼬리표가 필요했을 수 있다.
그러나 ‘명계남’만으론 국민의 감동을 얻지 못한다.
오래 가는 건 ‘국계남’(국민의 계보로 남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신형을 좋아한다.
하지만 곧 리콜당할지 모를 문제 많은 신형을 고를 만큼 서툰 유권자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참고로 이 글은 영화배우 명계남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박승희  /  중앙일보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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