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일 연중 제8주일-마태오 6장 24-34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8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젖먹이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들의 꽃보다, 하늘의 새보다 우리를 더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우리가 더 깊이 깨닫는 은총을 청하면서 미사를 봉헌합시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삶이 온통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찬 분들, 얼굴이 갖은 수심으로 울적한 분들, 오늘에 보다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과거는 몽땅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십시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 전전긍긍하는 분들, 그 미래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완전히 봉헌하십시오. 다만 지금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바로 지금을 사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오늘에 충실할 것을 역설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코린토 2서 6장 2절)
지금을 산다는 것, 현재에 충실하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마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기쁘게 산다는 것은 삶을 즐기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랜 노력 끝에 얻은 성취도 즐기고, 뜻밖에 찾아온 행운도 즐기지만, 반대로 수시로 찾아드는 고통도 즐기고, 원치도 않았는데 찾아온 병고도 즐기며 사는 삶, 더 나아가서 바오로 사도처럼 어떠한 처지에서든 기뻐하는 삶이야말로 즐기는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근심은 또 다른 근심을 불러옵니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불러옵니다. 그러다보면 하루 온종일 불안초조 상태, 과도한 스트레스 상태가 지속되어 심신에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됨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근심이 생길 때는 바로 기도를 시작할 때입니다.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는 바로 하느님의 도움을 구할 시간입니다. 불안초조감이 닥쳐올 때는 성경을 펴들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갖은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힘겹게 살아가라고 이 세상에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내 작은 울타리 안에 갇혀, 내 지극히 사소한 문제에 사로잡혀 괴롭게 살아가라고 이 세상에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큰 그릇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작은 것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찌질이가 아니라 대인배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무나도 작은 것, 지극히 사소한 것, 참으로 의미 없는 지나가는 것에 지나치게 연연하며 살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큰 그릇, 큰 나무가, 큰 인간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